일등 (一燈)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0)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종족이다. 기를 쓰고 새장 하나를 들고 우왕좌왕한다. 그 새장을 빼앗기면 그들은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빼앗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있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다. 어떻게든 밝게 살아가고 싶다며 열심히 노력한다. 옛부터 예술에서 일등품이란 늘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내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에서 모든 노력은 그 일등품을 만드는 일만을 향해있었을 것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는 그곳에 도달하고 싶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앉아 우리들은 그 일을 위해 노력해왔을 터였다. 그것을 계속해가는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신으로부터 받은 새장 하나뿐이다. 언제나 그뿐이었다.

 ‘대군(大君:천황을 가리킴) 곁에서’(‘우미 유카바(海行かば)’라는 일본 군가의 한 소절 - 역자 주)란 일본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받치고 갈 우산도 없다’(‘적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을 가진 일본 옛 시의 한 소절이며 고다이고 천황(後 醍 西胡 天 皇)이 읊었다 - 역자 주)는 말씀을 들으면 후지와라노 스에후사(藤原季房)가 아니더라도 분명 그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묵묵히 그리고 좌충우돌하며 지내야 한다. 그러기에 ‘비국민’ 딱지까지 붙으면 이것보다 서러운 일은 없다. 말도 안 된다. 나는 내 방식으로 이 기회에 빈자일등(貧者一燈)을 더욱 환하게 밝혀 둘 것이다.

 8년 전 이야기이다. 칸다(神田)에 있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형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 1933년 12월 23일 저녁 무렵이다. 나는 이듬해 봄에 대학을 졸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험은 하나도 보지 않은 채 졸업논문도 내지 않고, 졸업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본가 큰 형님에게 탄로 났기에 칸다에서 형님이 묵고 있는 하숙집으로 불려가서 그야말로 혼찌검이 날 정도로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고집이 센 형님이다. 이럴 때에는 눈앞에 있는 조금 모자란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나는 정자세로 무릎을 가지런히 꿇고 난로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에서 떨고 있었더니,

 “뭐야. 넌 장관 앞에라도 앉아있는 줄 알아?” 라고 말하고는 심기가 편치 않다.

 너무 자기 자신을 비하해도 안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책상다리를 하고는 얼굴을 살짝 들어 조금 웃어보이자 이번에는 건방진 놈이라고 혼이 난다. 이러면 안 되겠다며 서둘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남자답지 못하다고 야단을 맞는다. 어떻게 해도 혼이 났다. 나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형님의 화는 쌓여갈 뿐이었다.

 희미하게 바깥 거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하숙집 복도가 갑자기 쿵쾅쿵쾅 소란스러워지고 식모들의 속삭임, 작은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형님의 질타보다 그 쪽으로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어,

 “전등행렬이에요.” 라고 형님에게 보고했다.

 형님은 순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방안 창호지가 찢어질 정도로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황태자 전하, 1933년 12월 23일 출생. 온 나라가 기쁨에 휩싸여 있는 날에 나는 아까부터 형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중으로 슬퍼져서 감당할 수 없었다. 형님은 침착하게 전화를 들고서는 프론트에 자동차 한 대를 부탁했다. 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형님은 그러나 전혀 웃지도 않고는 얼굴을 돌리고 도테라를 벗고서 홀로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거리로 나가보자.”

 “네에.” 치사한 남동생은 너무나도 기뻤다.

 거리는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형님은 차창 밖으로 거리에서의 봉축행렬(奉祝行列)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국기의 홍수이다. 참고 억누르고 있다가 봇물 터지듯 폭발한 환희의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만세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잠지 후 형님은,

 “다행이다!” 라고 한 마디, 조용히 말하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안경을 벗었다.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1925년,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테루노미야(照宮:훗날 쇼와(昭和)천황의 첫 딸 역자 주)님께서 태어나셨다. 그 무렵 나는 학교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큰 형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기에 형님과 나와의 관계는 부자지간과도 같았다. 나는 겨울방학 때 생가로 돌아가서 형수님과 불과 며칠 전 있었던 테루노미야님의 출생에 대하여 말하고는 무슨 영문인지 눈물이 쏟아져서 나와 어쩔 줄을 몰랐다는 경험이 일치했다. 그 때 나는 이발소에 있어서 머리를 깎고 있었으나 소식을 알리는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울음을 참을 수 없어 매우 난처했었다. 형수님도 그 시간에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는데 불꽃놀이 소리를 듣자 더 이상 바느질을 계속할 수 없어 곤란했었다고 하셨다. 형님은 우리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나는 울지 않았어.” 라며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정말로요?”
 

 “글쎄.” 형수님도 나도 전혀 믿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니까.” 형님은 웃으면서 자기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런 형님이 지금 조용히 안경을 벗은 것이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얼굴을 돌리고는 안 보는 척을 했다.

 형님은 쿄바시(京橋) 바로 앞에서 내렸다.
 

 긴자(銀座)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다행이야. 일본은 이제 잘된 거야. 정말 잘됐어.” 형님은 거의 한발자국 걸을 때마다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전에 있었던 노여움은 벌써 어딘가로 사라진 듯했다. 치사한 동생은 죽다 살아난 심정으로 그 형님 뒤를 가벼운 마음으로 졸졸 따라갔다.

 A신문사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멈춰 서서 반짝반짝 빛나는 전광판 뉴스를 한 글자 한 글자씩 작은 소리를 내며 읽어간다. 형님도 나도 그 군중들 뒤편에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 전광판에 비춰지는 글자들을 차례대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가며 같은 문장을 싫증도 내지 않고 읽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님은 긴자 뒤쪽에 있는 오뎅 집으로 들어갔다. 형님은 내게도 술을 권했다.

 “정말 잘 됐어. 이걸로 이제 된 거야.” 형님은 그렇게 말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오뎅 집도 큰 난리였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사가 매우 흥겹다는 듯이 들어와서는,

 “자아, 여러분. 정말 축하해요!” 라고 말했다.

 형도 웃으며 그 신사를 맞았다. 그 신사는 출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턱시도를 입고는 이웃에게 축하인사를 돌았다는 것이다.

 “축하인사를 도는 건 좀 묘하네요.” 라고 조용히 말하자 형님은 술을 마시다가 엎질렀다.

 일본 전국 어느 산골짜기에도 지금쯤은 국기를 세우고 모두 방긋방긋 웃으며 전등행렬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나는 그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아, 멀리 보이는 작은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넋을 잃고 있었다.

 “황실전범(皇室典範)에 의하면…….” 방금 전 그 신사가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황실전범이라니, 거창하게 나왔군.” 이번에는 형님이 내게 조용히 말하고는 진심으로 기쁜 듯 정신없이 웃었다.

 그 오뎅 집을 나선 후 다시 다른 곳으로 들어가, 그날 밤 늦게까지 봉축행사로 넘쳐나는 시민들 속을 헤치며 걸었다. 전등행렬이 그려내는 불빛들이 파도를 이루며 끝없이 우리 눈앞을 천천히 지나가갔다. 형님은 자신도 모르게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소리쳤다. 그처럼 들떠있던 형님을 본 적이 없다.

 그처럼 순수하고 허름 없고 하늘을 찌를 듯한 전 국민적 환희와 감사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이제부터 좀처럼 없으리라. 바라건대 다시 한 번. 누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당분간은 인내의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