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血友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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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이 후보쿠(小酒井不木) (1927)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신념을 지키고 정신을 긴장시킨다면 그 긴장이 계속되는 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인 무라오(村尾) 씨는 봄날 저녁 간담회 석상에서 불로장수(不老長壽)법이 화제에 올랐을 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0년 정도 전에 제가 지금 그 자리에서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 날 아침, 저는 같은 동네에 사는 시모야마(下山)라고 하는 집에서 긴급환자가 있으니 어서 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나이 든 부인과 그녀를 보살피는 노파만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인 부인을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 집에서 진찰을 와 달라는 청은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노파에 의하면 그 부인은 매우 고령이며 더구나 경건한 크리스천이라고 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소문을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부인은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살았기에 누구도 그 집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부인이 병에 걸렸다고 하여 노파가 왕진을 청하러 왔기에 저는 어느 정도 호기심도 느끼며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도착하자 놀랍게도 주인인 부인은 안방에서 방석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욱 놀란 것은 부인의 풍채입니다. 일반적으로 노인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부인이 90세 이상은 된 것처럼 직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여러분도 상상하실 수 있겠지만 머리카락은 한 가닥도 검은 털이 없고, 얼굴은 수많은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는 처음 본 얼굴이지만 분명 심한 근심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어떤 일이세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라고 인사를 마치고서 물었습니다.
부인은 말없이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에는 기이하게 번쩍였으며 만약 상대방이 묘령의 여인이었다면 사랑에 불타는 눈빛이라고 밖에는 안 보였기에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 선생님, 저는 이제 죽어야 합니다. 선생님 손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아무튼 모시게 된 것입니다.
부인은 고령에 걸맞지 않게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만약 그 날이 가을밤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 대체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럼 부디 제 말씀을 처음부터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희 집에는 끔찍한 질병 혈통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신체 어딘가에 상처를 입고 피가 나오기 시작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멎습니다만, 저희 집 사람들은 그 피가 아무리 지나도 멎지 않고 몸속에 있는 피가 모두 나오고는 죽어간다는 기병(奇病)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말씀드리자면 조부도 부친도 숙부도 모두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또한 제 두 오라버니도 20세 전후에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조부 대에서부터 저희 집에는 사내만이 태어나고, 제게는 고모도 없고 또한 언니나 여동생도 없었습니다. 두 오라버니가 죽고 (이미 그 때에는 부친도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외동딸로 남았을 때 어머니는 어떻게든 저를 그 끔찍한 병에서 구해내고자 하여 남몰래 크리스천으로 귀의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홀로 된 것은 제가 13세 때입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부디 제가 세상에 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평범한 여인이라면 2~3년 뒤에 월경이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로 피가 멈추지 않고 죽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만 입지 않는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으나 이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처는 어찌 할 도리가 없기에 그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로부터 그 이유를 듣고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라버니가 얼굴에 작은 상처를 입고는 의사가 처방할 도리도 없이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에 재를 비비면서도 점점 창백해지며 죽어가는 모습은 지금도 아직 제 눈에 생생합니다. 아아, 끔찍한 일입니다. 너무나도 끔찍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제가 17세가 되어도 20세가 되어도 월경이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25세가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이제 어머니도 괜찮다고 안심하셨는가봅니다. 그 해 여름에 저 혼자 이 세상에 남겨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저를 보고, 너는 절대 시집가서는 안 된다, 시집가면 아이를 낳을 때 죽고 만다, 시모야마 가문은 네가 죽음과 함께 대가 끊기게 되므로, 최소한 150세까지 살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150세까지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어머니의 유언을 굳게 지키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작은 상처도 입지 않도록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단 한 번도 병을 앓지 않고, 또한 월경도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XXXX년 X월 X일 태어났으니 오늘로 꼭 만 150세가 되는 날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놀랐습니다. 만 150세라는 말에도 물론 놀랐으나 그보다도 섬뜩한 것은 부인의 눈빛이었습니다.
…… 그런데, 라고 부인은 말을 이었습니다. 그 눈빛이 한층 더 빛났기에 저는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습니다. …… 오늘 아침 갑자기 월경이 시작한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저는 이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어찌된 일인지 월경이 시작하고부터는 어제보다도 한층 더욱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생겼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부디 하실 수만 있다면 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150세인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긴장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습니다만 간신히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병은 혈우병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병은 그 가문 중에서 남성한테만 걸리고 여성한테는 절대 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15~16세 때 월경이 시작했다고 해도 부인은 절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인께서 믿고 계신 하나님은 여성한테 월경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한테는 혈우병이 걸리지 않도록 배려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오늘 월경이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피는 반드시 멎습니다. 부인은 그로 말미암아 죽고 싶다고 해도 실제로는 죽으실 수 없습니다.
제가 말을 잇는 동안 부인 얼굴에는 일종의 야성을 띤 표정이 떠올랐습니다만 점점 그것이 표면화되어가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말이 끝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150세를 먹은 부인은 그 깊게 주름이 박힌 두 팔을 뻗고는 제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저는 정신없이 부인을 밀쳐냈습니다.

몇 초 후, 정신을 차려보자 제 눈앞에 부인, 아니 부인 시신이 말라비틀어진 바가지처럼 추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무라오 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들고는 목덜미를 닦은 후 말을 계속했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인이 나한테 달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끔찍한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부인은 월경이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다른 질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150세라는 나이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정신적인 긴장이 풀리면 인간은 가차 없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말이 부인의 정신적 긴장을 풀어지게 했다면 제가 간접적으로 그 부인을 죽인 것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