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의사의 추억

홍성필 (2008)

 나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홍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홍 의사님’이나 ‘홍 박사’ 또는 ‘닥터 홍’도 아닌 그는 언제나 ‘홍 의사’였다. 물론 의사선생님이다. 이 ‘홍 의사’라는 단어가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어머니는 그를 ‘홍 의사님’도 아닌 그저 ‘홍 의사’라고 하셨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이 2008년이니 자그마치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소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

 여기는 아버지 생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어머니를 만나 혼인을 하시고는 계속 서울에서 지내셨으나, 어머니의 산달이 다가오자 “자식은 내 고향에서 낳아야 한다”는 아버지 주장에 못 이겨, 결국 그 곳으로 내려가 시집에서 기거하게 되셨다. 나중에 자라오면서 그 당시 생활을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모진 시집살이를 가끔 말씀하시곤 했다.

 팔남매, 남자만으로 보자면 삼 형제 중에서 둘째이셨던 아버지는 직장이 서울인지라 결국 조부와 조모, 그리고 백부 가정이 함께 사는 큰집에 홀로 어머니를 남겨두시고 상경하셨다.

 백부님 댁은 위에 딸 둘이 있었으나 역시 백모님이 만삭이셨으며, 공교롭게도 3월 중순에 사촌 형님이 태어나셨다.

 어머니의 출산예정일은 3월 하순. 같은 집에서 같은 달에 두 아이가 태어나면 안 좋다고 하여 결국 나는 큰 집 뒷동산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 집에 사시는 할머니는 연세가 많고 몸집이 작으셨으며 허리까지 굽으셔서 일명 ‘꼬부랑 할머니’로 통했다.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도 평탄하지 못했기에, 나중에 본 걸어가시는 할머니 뒷모습은 흘러간 노래 가사처럼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이었다.

 3월 28일 밤 여덟 시. 바로 그 ‘꼬부랑 할머니집’에서 내가 태어나게 되는데, 나를 받은 양반이 바로 ‘홍 의사’였던 것이다.

 “그 때는 어느 집에서나 애들을 산파가 받곤 했는데 아무리 초가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너는 그래도 의사가 받았다”는 말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조하기도 하셨던 어머니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장소는 막내이모 결혼식장. 여기서 ‘홍 의사’라 불리던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 왜 막내이모 결혼식에까지 오셨는지, 우리 집안과 ‘홍 의사’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 예전부터 ‘홍 의사’의 외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왔으나 연세는 50대 정도였을까. 실제로 보니 역시 들어왔던 대로 건장한 풍채를 하고 계시다.

 열 살에 갓 접어들었을 무렵이었으니 나름대로는 이른바 ‘어린이’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이 있었는지 “이 분이 홍 의사님이셔. 알지?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을 때, 그저 ‘안녕하세요’라는 진부한 인사를 하기 싫었다.

 “허어. 네가 성필이구나.”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시며 내민 손을 잡은 채로 어떤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는 아니다. 태어날 때 나를 받으신 분 아닌가. 분명 초면은 아니다.

 ‘오래간만입니다’인가. 아직 제대로 ‘갓난아기’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면했을 뿐인데 이렇게 인사를 해도 될까. 이것 말고는 어떤 인사말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곁에 서 계셨던 어머니.

 “얘는 왜 어른한테 인사하는데 아무 말이 없어? 얘가 좀 숫기가 없어서요.”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따뜻한 홍의사 손만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