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

홍성필 (1998)

1.

짜증이 나는 아침이다. 도대체 누가 아침을 상쾌하다고 했는가. 아마도 눈이 뜨면 진수성찬이라도 차려져 있어, 나비 넥타이를 맨 하인을 따라 나서면, 넓직한 식탁에 앉아 충분한 시간을 걸쳐가며 여유롭고도 우아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들이 만들어냈을 쓸데없는 소리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머리 속과 위장 안에서 난리를 치고, 자명종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일어난 아침의 어디가 상쾌하겠는가. 더구나, 같은 술이라도 마음 편히 마시는 자리였으면 위안이나 되겠지만, 헤어진지 2년이나 되는 마누라를 앞에 두고 마신 술이 얌전히 소화가 될 리도 없다. 신혼 초에는 그렇게 애는 더 있다 갖자고 했음에도 끝까지 우기더니, 지금에 와서 무슨 양육비 타령인가.

그렇지 않아도 빠짐 없이 다가오는 아침은 곤욕이다. 만약 신이 내게 다가와, 하루 중에 언제를 없애버리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침이라 말하리라. 아침만큼 이 세상에서 추악하고 더러운 시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계를 보았다고는 하나 도저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위안 삼아 오른손을 머리에 갖다 대지만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이마 만 더듬어 봤자 지독한 두통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늘 생각해 오던 일이다. 어떤 이는 잠이 들기 전 죽음을 연상한다고 하나, 나는 바로 이 저주스러운 아침에 죽음과 절망을 떠올린다. 예전에는 끓어오르는 심정을 억누르려고 자명종 시계나 전화기를 던져보기도 했으나, 그 정도로 풀릴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정말로 내가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머리통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 보다도 불행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나도 그들에게 비하면 몇 십 배나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속임수에는 안넘어간다. 아무리 나를 속이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약발이 서질 않는다. 부유하건 빈곤하건 간에 寬@?어떠한 형태로든 자신마다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삼중고와도 같은 어려움에 닥친 사람이라 해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김 과장 밑에서 오늘도 퇴근시간까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일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인지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이론이고 뭐고를 떠나서, 누가 이런 나를 보고 비난을 해도 좋지만 최소한 나는 이미 다른 사람 사정까지 감당할 힘도 정열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그래,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공허한 사실 만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잠자를 벌레로 만들어 버린 신이시여. 나를 벌레로 만드시오. 아니, 벌레도 싫소. 그래, 나는 무기체가 되길 원하오이다.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없고, 기쁨도 희열도 쾌락도 느끼지 못해도 좋으니 차라리 나를 무기체로 만들어 버리시오. 이제는 만사가 귀찮소이다.

쌓인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반사적으로 이불을 발로 걷어차 보니, 거기엔 묘한 것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묘하게도 없었다'.

침대 위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 보니 거기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이라도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무심코 옆에 있던 자명종 시계를 떨어뜨려 보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감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살며시 시계를 구멍 안으로 집어 넣고는 손을 놓았다.

시계가 구멍 안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간 모습을 확인하고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소리가 나질 않는다.

본래 바퀴벌레 하나도 제대로 죽이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으나,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에는 차분하게 무엇을 판단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역시 들어가 보았을 것이다.

다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집어넣고 두 팔을 입구에 받히고는 발을 바둥거려 보았으나 허공만을 가를 뿐이다. 그러는 동안 점점 이성이 되돌아와, 이대로 떨어 지면 모든 일이 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어느새 팔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2.

앗.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오로지 떨어진다는 사실 외에 느끼지 못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어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간다.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으나 입고 있던 잠옷이 벗겨져 버릴 것만 같은 가속도가 온몸을 휘감는다. 위를 쳐다 보았으나 이미 내가 들어왔던 입구는 밤 하늘의 별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하늘로 솟구치고 두 팔을 겨우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머리가 아래로 가는 일이 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인지 이제는 떨어진다는 인식조차도 없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분명 떨어진다는 것은 어딘가에 끝, 즉 바닥이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평상시 같으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은 채 입안을 맴돈다.

낙하와 충돌은 엄연한 연쇄과정 아닌가. 돌이 떨어져서 소리가 들리는 건 그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때문. 그래, 이제 끝이다. 여기 있는 어둠은 인생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말한다. 더 이상 헤어진 처와 과장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필요도, 나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아침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 자유. 자유. 삼 십 평생을 살아오며 이토록 해방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다. 달력도 시계도 이젠 나를 따라오진 못하리라. 잠시 후 닥쳐올 아주 짧은 통증만 참아내면 이제 나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만다.

아아, 얼마나 완벽한 자살인가. 내 몸은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며, 내가 사라졌다는 증거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말끔히 소멸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절대 밝혀질 수는 없다.



3.

현기증이 난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인가도 했으나, 아무래도 오랜 동안 받고 있는 가속도 탓인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닥칠 지도 모를 충돌에 가슴을 조이고 있었으나 이젠 조금 지쳤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100 킬로? 아무리 그래도 떨어진 시간을 볼 때 적어도 수 천 킬로는 돼 있어야 하며, 이미 내가 입고 있던 것들도 다 떨어져 나갔어야 하겠지만, 옷도 그대로이며 조금 어지러울 뿐 그 밖에는 모두가 정상이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기는 한가. 머리카락도 이제는 어디로 뻗혀 있는지 모르겠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손에 닿는 것조차도 없으니 짐작이 안 간다.

나는 정말 떨어지고 있는 것인가. 권태롭다. 떨어지고 있는지 앞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단지 둥둥 떠 있을 뿐인지도 알 수가 없다. 방향감각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잃은 채 발을 움직여 보아도 도무지 앞뒤를 모르겠다.

떨어지지 말걸 그랬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머리 속에 떠오른 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막무 가내로 뛰어들 때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후 회를 한단 말인가. 이 속으로 뛰어든 내가 후회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에 등을 돌리려 했던 내가 후회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다시 올라가려 해도 출구는 보이질 않는다. 출구로 다가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이게 자유란 말인가. 해방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좋소. 나를, 제발 나를 좀 구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