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과 적적함과 고요함과

홍성필 (2008)

 2008년 4월 6일. 밖에는 비가 내린다.

 오늘 늦게 내린다던 비를 못 믿어 우산 하나 가지고 나가 하루 종일 설쳤으나 이런 날이면 일기예보가 맞는다. 흐리던 하늘에는 저녁 11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적적하여 죄 없는 이부자리 뒤척이다가 종일토록 가방 안에서 서성이던 우산을 끄집어내어 집을 나선다.

 그러자 언제 내렸냐는 듯 비는 멈춘다. 그래도 우산을 펼쳐 어깨에 얹고 한 발 두 발 걷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종이 한 장 들어있다. 묵묵히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것보다 글이라도 끼적여볼 셈으로 마치 화장실로 나설 때처럼 주머니에 종이 한 장 쑤셔 넣은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베란다에서 비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울 때 다자이를 떠올렸다. 그는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遺書를 쓸 생각으로 晩年을 완성했다.

 그래. 遺書 한 번 쓸 작정으로 글을 적어 내려간다면 무엇이든 완성할 수 있었겠다 싶다. 하지만 나, 그러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것 같다. 적어도 천하 모든 喜樂은 겪어본 후, 인생 말년 솔로몬의 넋두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라면 모를까.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如何튼 쓸쓸했다. 집에서 혼자 맥주 3캔을 비운 것이 문제였을까. 아무튼 우울했다. 집 근처 주막 ‘고향집’에 들어와 아까 그 종이 한 장 꺼내어 되지도 않는 글을 적기 시작한다.

 한자에서 막힌다. 무슨 達筆도 아니고 漢字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적적할 적’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야 물론 한글로 써도 무방하겠지만 왠지 ‘적’자가 쓰고 싶다. 마음 안에 ‘敵’이 많아 이와 차별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지 않아 결국 전화기를 든다.

 12번째 벨이 울린 후 잠결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응. 난데…….”

 “알아. 무슨 일이야.”

 “‘쓸쓸할 적’자가 생각이 안 나서 말이지.”

 “뭐?”

 “아니, 별건 아니고, 한자에서 ‘쓸쓸할 적’자인지 ‘적적할 적’자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마음 속에 있는 ‘적 적’과는 구별을 두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쓸쓸할 적’인지 ‘적적할 적’인지라는 글자를 꼭 한자로 쓰고 싶은데……. 너도 알겠지만, 아, 내가 얘기 안했던가. 아무튼 내 안에는 적이 많거든. 아니, 그러니까 ‘적적할 적’이나 ‘쓸쓸할 적’이 아니라 ‘적 적’자 말이야. ‘enemy’의 적 말이야. 그래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쓸쓸할 적’인지 ‘적적할 적’인지를 한자로 쓰려고 하는데 잘 모르겠더라고. 너 혹시 설명해줄 수 있겠어?”

 “너 지금 몇 시야?”

 나는 분명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은 아니다.

 “한 시 삼십…….”

 “…….”

 그 때 내가 들은 대답은 나 자신이 포유류인지 파충류인지를 의심하게끔 하는 내용이었다.

 쓸쓸함은 얼마 전에도 느꼈다.

 며칠 전 거의 10여년 만에 한 학과 후배를 만났다.

 “형, 요즘 애들(후배들)은 가끔 만나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만나서 며칠 후 형을 만난다고 했는데 아무도 나온다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그들’과 나는 가는 길이 다르다. 나를 만나봐야 그들이 줄 것이란 술잔 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전화기를 다시 들고 또 다른 번호로 걸었다.

 “야, ‘적적할 적’이 뭐지?”

 “…….”

 “음. 그래 고맙다.”

 그래. 고맙다. 그대 덕분에 적적할 적, 아니 ‘고요할 적’을 알게 되고, 그대 덕분에 ‘고요함’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