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에 대한 그의 회고

홍성필 (1993)

한가한 일요일을 집에서 보내고 있는 나에게 문득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상대방은 그다지 의외인 인물은 아니었으며, 종종 같이 만나서 술이나 마시면서 허물없이 얘기나 할 수 있는 이른바 '친한 친구녀석'이었다. 목소리가 신통치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시 옛 날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맘 때가 되면 항상 있어 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를 받은 후 세수를 한 다음 옷을 입고 약속장소로 나가봤다. 어지간히 속이 답답했는지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한 나를 그는 맞이하였다.

늘 가던 술집이 아니라 조용한 찻집에나 들어가자는 그의 제의에 약간은 의아했지만, 얼굴을 보니 기존의 그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또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그러나?"

내 물음에 대해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찻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커피와 코코아를 시키고 나서는 서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잔인하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물론 공포영화나 추리소설 등에 나오는 그런 잔인함이 아니라......"

이렇게 시작된 그의 말은 새로운 사실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으며, 찻집에서 나온 후에 들어간 술집에서는 자신의 일기장까지도 보여주었다.

다음은 그가 한 말을 정리한 것이다.

. . .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서 맴도는 말이 있다. 잔인함에 대한 짧은 말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어느 한 순간에 종종 떠올리게 되는 이 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애착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혐오하고 있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떠올림으로써 잔인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말이 그녀에게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를 이제와서 따져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셈이었지만, 그러나 가슴 어딘가에 응어리가 지어있어 풀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3년 전 겨울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하기에도 어딘가 무색할 정도인 당시 21살의 나는 그 해 중반부터 엉켜있던 문제의 절정을 맞이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과는 달리 그 때는 이른바 '연애', 혹은 '남녀관계'로 미화되기 쉬운 일에 대한 쓰디쓴 경험을 하고 있었으며, 나에게는 아직 '여자'라는 존재가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그 해 여름의 결단을 내 손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다음은 그가 내게 보여준 일기장의 일부분이다.)

-- 19XX년 8월 X일

어제 겨우 집에서 올라왔다. 이제 내 일이 산적해있는 서울로 올라왔으니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어 심신이 가벼워야 할 상황이나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내게 있어서 XX이의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단순한 여자친구? 다른 단어를 찾을 수는 없으나 이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한다. 만약에 '단순한 여자친구' 때문에 내가 이토록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내가 여간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단순한 여자친구'의 정의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게 있어서 XX이는 그렇게 부담없는 대상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부담'이란 무엇인가. 이는 내가 XX이를 좋아하는 만큼, XX이도 나를 좋아하고 있음으로써 발생하는 '부담'이다. 오히려 이와 갈은 부담을 느끼는 나도 이상할 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XX이를 만난 후 1년 동안 나는 그 이전보다 공부나 열심히 할 수 있었는가. 또는 나름대로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던 학교에서의 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였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정을 짓기가 두려웠다.

단정을 짖기가 두려웠던 이유......이는 어디까지나 타의적이 아닌 자의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접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쪽에서도 나에게 접근을 해 왔을 리 만무하다. 결국 내가 뿌린 씨 아니겠는가. 그런데 적극적이었던 나 자신이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는 얼마나 무책임한 인간인가......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런 고민도 '그저 그런 여자문제'로 보이겠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이 '그저 그런 여자문제' 이외에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무책임함. 무책임함.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단어이다. 이 말 앞에서 내가 자신있게 부정을 할 용기가 생기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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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일기장이라 정리가 되지 않은 산만한 글이긴 하지만 그 자신의 적지 않은 혼란함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이 일기를 쓴 몇 일 후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여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걸려오는 전화, 날라오는 학보, 편지,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일기장이 든 소포...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그에게는 이와 같은 그녀의 행동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오는 편지는 읽지도 않고 태워버렸고, 같이 찍은 사진은 찢어 버리고, 보내온 일기장은 그대로 다시 봉투에 넣어 돌려보내고......

결국 그녀도 지친 듯,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어리석게도 그는 기존에 자신의 생활을 찾지 못 했던 것이 그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버린다. 친구인 나로서는 차라리 깨닫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없지 않으나, 이 점에 대한 생각은 내 앞에 앉아 있었던 그도 역시 대동소이할 것이다.

3개월 후, 이미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을 12월, 신촌 공중전화에서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리하여 그 달에 몇 번 만나게 되는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던 그녀가 다시 그를 받아 주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한 순간에 그치지는 않았나보다.

결국 1월에는 그 만남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헤어짐을 겪게 된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나에게 말을 해 주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그녀가 했던 말 외에는......

그녀에게 '나도 너와 같이 찍은 사진이나 편지도 모두 찢어 버렸으니, 너도 그렇게 해 달라'는 그의 부탁에 대해 그녀는 이런 말로 답하였다고 한다.

"그냥 잊어버리는게 더욱 잔인하지 않겠니?"